분청사기란 무엇인가

 분청사기(粉靑沙器)란 그릇 표면을 백토로 화장한 다음에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라는 뜻이다. 일본인이 미시마(三導)라 부르던 것을 1940년대에 개성박물관장을 지낸 고유섭(高裕燮, 1904~1944)이 우리 식으로 이름을 붙였다.

 

분청사기철화물고기무늬병│조선시대, 높이38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분청사기는 형태나 문양에서 가장 한국적이며 또 현대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느낌은 순박한 시골 청년을 닮았으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자유분방함에 익살까지 가득하다. 이것은 14세기 이후 사대부라 불리는 선비들이 고려사회를 이끌던 가치 관념을 버리고, 유학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나타났다. 즉 내세의 극락왕생보다는 사람의 본분을 지키면서도 현실 속에서 더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살자는 유학적 현세관이 표출된 것이다. 그 결과 그릇도 실생활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또 검소하고 질박한 생활을 추구하자 화려한 것보다는 소박한 것들이 어울렸다.

 

 따라서 고려청자처럼 하나하나에 상감 문양을 넣기보다는 도장으로 꾹꾹 눌러 찍거나,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려 실생활에 편리한 그릇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분청사기는 고려청자가 일반 생활화 내지 대량 생산화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상감청자의 모습이 대중화된 형태가 바로 분청사기이고, 15세기 전,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쳐 대략 150년간 유행하였다.

 또 청자와 백자가 국가에서 관장하는 가마(관요)에서 제작된 반면 분청사기는 지방의 호족을 위한 생산품으로 지방에 따라 고유한 문양과 색깔을 지녀 엄격한 아름다움에서 탈피하고 있다. 물론 대량 생산을 하다 보니 색깔도 다소 칙칙하거나 조잡해지고 섬세한 문양도 대범히 생략되었지만 그래서 더욱 회화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분청사기의 한국적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기형(器形)과 제작기법이다. 기형은 고려 말 청자를 바탕으로 좀 더 풍만해지면서도 율동적으로 변화되고, 안정감이 높으면서도 실용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편병(扁甁)은 물레에서 기물을 만든 다음 양쪽을 눌러 납작하게 만든 병으로 야외 모임에 술을 담아 가던 용도로 쓰였다. 이런 형태는 고려시대에는 없었고 문양도 모란 당초가 흑백 상감으로 표현되든지 혹은 물고기를 추상적으로 그려 넣었다. 물고기는 알을 많이 낳으니 자손이 번성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기고, 모란꽃은 부귀와 번창을 뜻하였다. 장군은 곡물의 씨앗을 담아 두던 용도로 만들고, 모양이 똥장군과 흡사하여 볼수록 흥이 난다. 또 자라병은 야외용 술병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자라처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인화기법은 꽃 모양의 도장으로 찍은 뒤에 백토로 분장하고 그것을 닦아 내면 도장이 찍힌 부분은 백토가 감입(嵌入)되어 흰무늬로 나타난다. 이것은 일일이 손으로 파내야 하는 상감기법의 수고를 덜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그중에서 국화 무늬가 주류를 이룬다. 박지기법은 기물을 백토 물에 담갔다가 꺼내고는 무늬 이외의 배경을 긁어내는 기법이다. 태토의 검은색과 백토 무늬가 선명하게 대비되고, 나아가 연꽃, 물고기, 잎 등의 소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려 감상미가 독특하다.

 

 또 귀얄기법은 태토 위에 귀얄(올이 굵은 풀비 같은 붓)로 백토를 힘있고 빠른 속도로 발라 박진감과 추상화 같은 현대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 외 철화기법은 백토 분장 위에 철분 안료로 무늬를 그렸는데, 계룡산의 일반 도공들은 구김살 없고 천진스러운 물고기 무늬를 많이 그렸다. 그리고 덤벙기법은 기물을 백토물에 덤벙 담갔다가 꺼낸 뒤 구운 것으로 표면이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을 준다. 또 대체로 백토가 두텁게 묻어 있어 얼핏 보면 백자와 같다.

 

 15~16세기경, 경상남도 일원의 이름 모를 가마에서 조잡한 막백자(분청사기의 일종)가 그릇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때깔을 검스레 희지 않고, 솜씨 또한 거칠어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발이다. 더욱이 형태가 잡히는 대로 유약을 발라 사발 굽과 등 쪽에는 태토가 듬성듬성 보일 정도로 거칠어 마치 두꺼비 등처럼 험상궂게 얼룩져 있다. 기껏해야 주막의 막걸리 잔이나 밥공기로 밖에는 소용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도공의 손이 농익고 욕심도 없어 구수한 맛이 풍겼다.

 그 당시 포항, 마산에는 일본 상인들이 들어와 그들의 상품을 팔고 우리의 물건을 가져갔는데, 그 중에 이 막백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소박하고 부드러운 맛에 금방 반했다. 차를 즐기는 일본인은 이 거칠고 투박한 그릇을 다완으로 쓰면서 마치 상전이나 모시듯 비단 보자기에 싸고 오동상자에 담아 가보로 대를 물렸다.

 세월이 흘러 그릇이 이러저리 옮겨 다니기도 하고, 금도 가고 깨지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권력자나 풍류가의 기호품으로 애장 되었다. 고미술품이 아닌 생활용기를 그들은 그럴듯한 이름까지 붙여 족보까지 만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막백자는 그들의 중요미술품과 국보로 지정되어 일본 내에서도 억대의 구중품으로 자리 잡아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1989년 교토에서는 4백 년간 일본의 명문가와 큰절에 비장되어 온 50여 점의 그릇들을 전시하였다. 16세기 무렵의 우리 그릇들을 그들이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빼앗아 갔거나 알 수 없는 경로로 현해탄을 넘어간 것들이다. 심포지엄에서 한 일본 학자는 막백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 다완을 물론 조선시대의 막사발이긴 하지만 우리 일본인에게는 신앙 그 자체이며 우리들의 마을을 평화롭게 했고, 한없이 기쁘게 했고, 또 숭고하게 했고, 우리의 마음을 영원한 안식처로 이끌어 주었던, 우리에게는 보물 아닌 신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한국미의 산책> 고유섭,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윤용이